닫기 버튼

고우석 원장의 Day Out
압구정서울성형외과 이민구 원장①

기사입력 2019.08.01 22:25

뉴스기사 사진1 고우석 원장의 Day Out이 이번에는 성형외과로 발을 넓혔습니다. 그 첫번째로 압구정서울성형외과를 찾아 이민구 대표원장을 인터뷰했습니다. 압구정서울성형외과는 한국 성형외과의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걸어온 병원입니다. 압구정서울성형외과의 시작과 발전 과정, 해외 진출과 외국인 환자, 그리고 앞으로 한국 성형외과의 미래 등 폭넓은 주제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고우석 원장의 성형외과 탐방, 지금 시작합니다.

고우석 원장: 먼저 공통 질문입니다. 공통 질문으로 성형외과를 선택한 이유는?

이민구 원장: 미술을 좋아했어요. 의대 다닐 때도 미술반에서 활동했구요. 그래서 성형외과가 취향에 맞았던 같습니다. 그리고 성형외과가 수입이 좋은 것도 영향이 있었고…, 마이크로 수술을 좋아해서 본과 2학년 때부터 그걸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3학년 방학 때 성형외과 레지던트 쥐실험 하는데 어시스트했어요. 거의 서브 인턴이라고 할 수 있었죠. 그래서 그런지 성형외과 시험도 제일 잘 보았어요. 들어가기 어렵다고해서 학생 때부터 열심히 했습니다.

고우석 원장: 이민구 원장님이 레지던트 하던 시기가 사실 엄청난 때였잖아요. 그때 선후배 전공의들이 김병건, 박상훈, 박원진, 박양수, 홍진주 등 웬만한 사람들 다 아는 성형외과 의사로 성장을 했죠. 그런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레지던트 하던 시기에, 쟁쟁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민구 원장: 엄청 많은데요. 그때 저희 5년 위아래 연차가 좋은 인력이 많이 모여서 경쟁이 심한 때였습니다. 때일 수로? 좋은 인력이 모이는 것 같다. 아무리 친해도 자기 수술하는 건 안보여 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어요. 서로 엄청 견제하던 시절이어죠.

그래도 당시 서울대 성형외과는 다른 병원 레지던트와는 다르게 직접 본인 환자의 수술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유일한 병원이었죠. 1년차, 2년차 때 수술을 하는 걸 몇 백 개를 보고, 저는 1년차부터 수술 시작했어요. 그때 첫 수술이 서울대 병원 직원이었어요. 1년 동안 커피도 사주면서 친하게 지내면서 신뢰를 쌓아놓고 쌍꺼풀 수술을 싸게 해주겠다고 했죠. 떨리는 마음으로 수술을 한 기억이 나네요. 어쨌든 그렇게 제 환자를 몇 백 명 하고 나왔어요. 그러다보니 다른 병원 의사들하고는 경쟁이 안 되었어요. 수술을 한 번도 안 한 의사하고 수백 건을 한 의사가 개원가에서 경쟁을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뉴스기사 사진2 고우석 원장: 그러다 어떻게 개원을 하게 되었나요? 아시다시피 그당시는 서울대에서 전공의를 하면 누구도 개원을 하겠다고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문화였잖아요. 그런데 결국 피부과 한두 명 빼고 모두 개업을 했고, 성형외과도 다들 개원을 했죠. 이민구 원장님은 어떤 계기로 개원하게 되었나요?

이민구 원장: 서울대 성형외과 펠로우를 할 때는 주로 미세혈관 수술, 두경부암 수술 후 재건 수술, 유방암 수술 후 재건 수술 위주로 했죠. 보라매병원에서 펠로우 할 때도 미세수술을 했는데, 다음 서울대 성형외과 스태프를 미세수술을 전공한 의사로로 뽑겠다고 했고, 마이크로 하는 사람이 저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당연히 저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 있으면 교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분이 먼저 교수가 되었죠. 결국 마이크로 수술을 하면서 교수가 되려면 너무 오래 걸리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보라매병원 성형외과 교수 한 분이 개업을 했는데, 잘 돼서, 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죠. 또 제가 아는 분이 병원을 하는데, 저 한테 ‘몸만 와라, 인테리어나 장비 다해주겠다’라고 하셔서, 조건이 좋다고 생각하고 개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압구정동 ‘클리닉9’ 건물에서 제 병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우석 원장: 타이밍 적절하게 제안이 들어온 거네요.

이민구 원장: 그때가 정말 미용 시장의 피크였던 1999년, 2000년이었어요. IMF가 지나가고 신용카드를 엄청나게 발급하면서 경기가 어마어마하게 좋은 때였잖아요.

고우석 원장: 그 당시의 병원 이름이 압구정서울성형외과였나요?

이민구 원장: 그때 동문이 같이 하는 서울성형외과가 전국에 몇 개 있었어요. 압구정, 관악, 부산, 울산, 강릉, 청주 등 서울성형외과 네트워크가 있었죠. 압구정서울성형외과는 저하고 두 분이 함께 동업을 했는데, 한 분은 코만하고, 또 한 분은 뼈만 하고, 나머지는 제가 다 하는 조건이었어요. 재무, 세무 등도 다 제가 했죠.

고우석 원장: 사실 압구정서울성형외과의 변천 과정이 파란만장하다고 알고 있고, 그게 우리나라 성형외과 병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병원의 성장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이민구 원장: 일단, 2000년 7월에 개원했는데, 첫 달부터 흑자가 났어요. 섭외한 것도 아닌데 방송에도 많이 나오고. 또 눈, 코, 윤곽 등을 분야별로 나눠서 한 게 우리가 처음이었어요. 온라인마케팅도 우리가 처음이었는데, ‘선영아 사랑해’로 유명했던 마이클럽에 성형 상담을 했었죠. 그때 하루에 50개씩 상담이 올라왔어요. 그리고 프로포폴도 우리가 처음 들여왔어요. 대학에 있을 때 보고 아프지 않게 ‘무통 마취’라고 마케팅했죠.

고우석 원장: 그 기사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마취 자체가 무통인데, 마취를 하면 자고 통증이 없는데, ‘무통 마취’는 뭐가 다른 거냐’고 우리들끼리 무척 궁금해 했죠.

이민구 원장: 그 전에는 성형수술을 전신마취 아니면 부분 마취로만 했잖아요. 수면 마취가 없었으니까, 우리가 프로포폴로 그걸 처음 한 거죠. 국소마취만 하던 시절에 환자들에게 전신마취 안하고도 수술하는 소리도 안 들리고 아프지도 않다고 설명했어요.



- 2부에서 계속 -

다음 뉴스 보러가기 ▼